2020년 5월 2일 토요일 생명의 삶 묵상 [신명기 12:8-19]
우리가 계속 묵상하고 있는 신명기는 11장까지가 파트1, 12장부터가 파트2로 나뉜다. 1장부터 11장은 모세가 십계명을 중심으로 개론적인 설명을 해주는 파트로서, 계명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보다는 십계명의 중심 내용과 십계명을 받을 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2장부터 26장까지는 이제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서 그 각론적인 부분, 즉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준다. 그래서 12장부터 26장까지가 파트 2이다. 이 신명기의 두 번째 파트를 우리는 5월 한 달 동안 묵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십계명에 대한 자세한 적용을 알려주는 것이 왜 그 백성에게 필요할까? 신명기는 늘 미래지향적인 책이다. 무슨 말이냐면, 모세의 고별설교로서 이 신명기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 설교를 하고 있는 모세나 모두 가나안 땅에 대한 경험이 없다. 그런데 이 신명기는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한 이후에 세우게 될, 그 나라의 법에 대한 설명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땅의 법을 미리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개론적인 것, 전체적인 틀만 말해주면 그냥 뜬구름 잡는 일이 되고 만다. 한 나라의 법이 달랑 10가지의 계명으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세부적인 것들이 없이는 절대 운영이 되지 않는다. 많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제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이후에 각 계명을 가지고 어떻게 그 나라에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가르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은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시다. 어떻게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그 말씀의 권위 앞에 순종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것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신다. 그 친절한 노력의 일환으로 모세가 주어졌고, 모세가 그 백성을 향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어떨까? 예수님이 복음서로서 주신 말씀만 있었다면 우리는 많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고, 그들을 통해 성경을 완성하게 하셨다. 또한 그 기록된 성경을 우리가 묵상할 때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역사하셔서, 기록된 성경이 문화적인 차이, 시대적인 차이, 언어적인 한계,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일하신다. “상황화”가 일어난다. 각자의 삶에서 각자가 살아있는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가? 기록된 말씀은 전체적인 개론이지만, 성령님이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구체적인 각론이다. 그래서 그 옛날에 모세를 통해 일하신 방식이나, 지금 우리에게 일하시는 방식은 똑같다. 이 모든 것은 다 그분의 은혜의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뿐이다.
모세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도 구체적으로 적용이 될 줄로 믿는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이것이 가능하다. 그 기대를 가지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한다. 그것으로 인해 ‘율법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늘 ‘복음’을 듣는 우리가 되자.
자 그렇다면 이제 십계명의 구체적인 적용점들을 보여주는 신명기 파트 2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어제와 오늘의 본문인 신명기 12장은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점에 대한 말씀이다. 그 계명들을 떠올려보자. 무엇이었는가?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결국 무엇에 대한 계명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어제와 오늘의 본문에 담겨 있다. 먼저 8절을 보자.
[신명기 12:8]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모세는 이들이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한다. 그 문제점에 대해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라는 평가를 내린다. 어제의 본문인 1절부터 7절까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세 가지로 나온다.
1. 주변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에 대해 경계심이 없다.
2. 고정되지 않은 성막
3. 규정대로 드리지 않은 헌물
이 모든 문제들은 다 광야라는 장소가 주는 제한으로 인해 잠시 허용된 것들이다. 그러나 광야가 아니라면 당연히 해결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광야이기 때문에 주변 민족들에게 둘러 쌓여있고, 남의 땅을 드나들어야 한다. 지금 이들이 머문 곳도 사실은 모압의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섬기는 잡다한 신들에 대해 별다른 경계심이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고정되지 않은 성막으로 인해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제사에 대한 규례를 다 지킬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이동으로 인해 절기와 월삭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례조차 광야에서는 실행할 수 없었음을 생각해보라.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예물, 제물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규정한 대로 처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허용된 것이 광야의 삶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이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말, 즉 ‘광야니까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을 가나안까지 가지고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여기에서 잠시 하나님이 허용해주신 것, 즉 은혜의 영역에 불과하다. 그 은혜를 남용해서 그 땅에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 착각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광야 이후의 삶, 가나안에서 새롭게 세워질 그 땅에서는 그들이 예배할 때, 반드시 지켜야 될 구체적인 것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하나님이 지정하신 한 곳에서 예배하라. 이방인들과 같이 아무 곳에나 산당을 세우지 말아라.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시려고 지정하신 장소, 즉 성소만이 예배의 장소이다.
2. 하나님이 정하신 예배의 절차들, 특별히 예물, 제물에 대한 규례를 지켜라.
3. 레위인을 책임지고 돌보라.
이 세 가지가 왜 중요할까?
먼저 장소의 문제는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습관을 따르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우상을 손으로 만들고,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장소에 두고, 신격화한다.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의 권위를 위해 신을 섬기는 척을 한다. 우상숭배의 근원적인 모습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배척하신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하여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은 그분을 아버지로서 경외하며 사랑하는 예배자를 기뻐하신다. 또한 한 장소는 결국 단 하나의 구원의 길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 그를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물, 제물에 대한 것인데, 특별히 피를 먹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제단에 쏟는 용도로만 쓰라고 강조하고 있다. 왜 이것을 강조할까? 이방인들이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그 기본부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자기의 복을 위해 비는 용도 즉 ‘기복’이고, 후자는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 즉, 구원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백성을 위해 모든 일을 하셨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구약으로는 유월절이요, 신약으로는 십자가이다. 늘 피가 그 중심에 있다. 죄로부터의 구출이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대속’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늘 제단에 쏟아지는 그 피를 보면서 그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구원에 대한 마땅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다른 용도로는 절대로 그것을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을 자기의 음식을 삼는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결국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임을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지막 세 번째, 레위인을 돌보라는 명령이 왜 강조되고 있을까? 다른 모든 지파는 공짜로 땅을 분배받는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그렇지 않았다. 오직 그들은 예배자들이 가지고 오는 제물에서 그들의 모든 경제적인 공급을 받는다. 자기의 땅이 없기에 그들이 마땅이 드릴 예물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자기의 일을 내팽개치고, 뭔가 다른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제사가 멈추고, 예배가 멈춘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제사장, 레위인들을 그 사회의 가장 약자로 취급하셨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레위인들을 늘 돌보라는 명령을 계속하셨다. 이 명령을 계속하셨다는 것은? 그 말씀을 그들이 대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은 예배가 계속 진행될 수 있는 장치로서 레위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먹이고 입힐 책임이 예배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노동’으로서 목회자들의 일을 바라보면, 그만한 ‘사례’를 받을 가치가 있을까? 그저 교회에 나와서 설교하고, 예배를 진행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주당 5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일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의 예배를 돕는 필수적인 요소로 여기는 것이 옳다. 그래서 그들이 나와 비슷한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예배자의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 속에서 예배할 때에 건강한 예배의 공동체가 세워진다.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권위를 계속 인정하게 되고, 그를 조종하려는 탐욕를 내려놓게 되고, 하나님이 이미 주신 구원의 기쁨을 계속 노래하게 된다.
이 모든 예배의 요소들을 끊임없이 지켜나가고,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우리 교회가 날마다 성장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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