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이 시의 저자인 다윗은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상상으로 이 시를 시작하고 있다. 특별히 다른 민족들이 자기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상황 속에서 이 상상을 대입시켜보았다. 이 상상은 어떻게 이어질까?
3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가정을 끔찍한 상황인, 전쟁 속에 넣어보았다. 안그래도 끔찍한 전쟁은 정말 그 어떤 말로도 상상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으로 전락한다. 두 가지 이미지가 나오는데, 하나는 맹수에게 잡혀서 산채로 질겅질겅 씹히는 어떤 사람의 이미지이다.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어떤 길을 걷다가, 늑대 무리에게 둘러 쌓였다. 나는 분명히 아직 죽지 않았는데, 이 녀석들이 내 목덜미를 물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만들어두고는, 내 허벅지에서 살코기를 분리해서 뜯어먹는다. 너무나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가장 큰 우두머리가 되는 녀석이 내 목을 짓누르고 있기에, 소리조차 못 지른다. 그러나 나의 귀는 이 늑대들이 내 몸으로부터 살들을 뜯어가는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
두 번째 이미지는 홍수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한 홍수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상상 속의 물의 괴물이 그들을 덮치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홍수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한 번이라도 물에서 허우적거려본 사람은 그 공포를 안다. 물이 내 코로 들어오고, 숨을 쉴 수가 없고, 아무리 발을 휘저어보아도, 몸은 점점 물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만 한다. 이처럼 공포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이처럼 이스라엘은 늘 대적들의 위협 가운데 살고 있었다. 모두가 그 나라를 잡아먹기 위해 온갖 준비를 다 마친 군대들로 주변이 가득했다. 주변에서 가장 작고 작은 나라였다. 군사력으로도, 외교력으로도, 늘 약세에 놓인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면 그 나라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의 숱한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고, 은혜였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모든 사실 앞에서 그 단서를 빼는 상상을 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상상만 했던 끔찍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야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생각해보자.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이라는 이 여정을 살아가고 있다. 안전한가? 평안한가? 대적의 위협은 없는가? 다윗이 말하는 것과 같은 맹수의 위협과 물에 사는 괴물의 위협 같은 것이 전혀 없는가? 늘 잔잔한 강 같은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늘 실제적인 위협과 공포를 선물한다. 순간순간이 공포이다.
가끔 언론에 누군가의 영웅담이나, 누군가가 했다는 착한 일에 대한 기사가 올라온다. 그러면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린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인생은 살아갈만 한 것이야. 아직도 세상은 살만해. 간만에 따뜻하다.”
그러나 그 기사 하나가 뉴스에 올라올 동안, 수많은 강도, 살인, 강간, 테러, 전쟁, 기근, 지진, 태풍 등의 기사가 그 뉴스사이트를 꽉꽉 채운다. 믿음이 있다는 우리가 봐도 끔찍한 일들 밖에 없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 곧 망할 곳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지 않으셨다면? 그러지 않아도 끔찍하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나의 삶,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안 그래도 끔찍한 세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더욱 끔찍하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상상, 우리의 이러한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들에게 내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의 손에 주지 않으신 것과 같이, 우리를 이 땅의 소용돌이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기로 결정하셨고, 여전히 우리 편에 서 계시기로 결정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우리가 무엇을 잘했기에 주어진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우리는 행위로 따지면 그냥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붙잡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와 소망을 누린다. 올무에 잡힌 새가 아니라, 자유롭게 이 땅을 날아다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게 되었다. 여전히 이 땅은 위협적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자유롭기만 하다. 오직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그 사실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도우심에 있다. 다른 이들인 이 위험한 세상 속에서 늘 다른 것에 소망을 둔다. 이 땅의 방식에 더 몰입하고, 그 방식대로 경쟁하고, 그것으로 남들 위에 올라서는 것에 소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믿음의 길을 걷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그것은 거들떠보기에도 시간이 아까운 짓에 불과하다.
그 이유를 8절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준다.
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섭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여전히 살아계심을 경험한다. 믿음의 눈은 이 위험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것과, 그가 여전히 이 땅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 창조의 하나님, 여전히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연결시키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돕는 자가 되심을 늘 삶 속에 경험한다. 그렇기에 늘 그분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삶을 걸어가게 된다. 잘 생각하자. 우리의 삶은 위험해야 정상이다. 그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그것은 이 땅의 삶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전히 내 편이시다. 그는 창조자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여전히 이 땅을 섭리하신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 이름에 우리의 도움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우리에게 만족을 줄까?
2019년 9월 28일 새벽 설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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